독서 기록

염소를 모는 여자

에너벨라 2016. 5. 13. 14:45

 염소를 모는 여자    <2007-12-19 10:53알럽블로그>

                                                 전경린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탈피의 냄새가 풍기는 제목이다. 결혼하고 애 한둘 낳고 키우는 과정에 있는 전업주부들이라면 한번쯤은 느껴 보았을법한 얘기들이다. 이미 나는 그시기를 많이 지나온 결혼14년차 주부라는 점에서 뒤를 돌아보니 지난 그 시절들에 이 책속의 주인공과 비슷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기도 하다. 성격이 그리 활달하지 않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염증을 느끼곤 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글을 읽고 있으면,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과감하게 해버리고 마는 주인공들의 얘기에 묻혀 책속에서나마 나는 일탈을 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한때는 좀더 찬란한 무엇이 되어 시간보다도 더 빨리 가리라, 꿈꾼 적도 있었다. 신문이나 여성지가 나의 행보를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빛나는 존재.......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훨훨 나는 자유로운 존재. 그러나 불운이 겹치고 겹치면 좌절도 깊은 잠처럼 깊어진다. 비행을 꿈꾸던 깃털은 오래 쓴 빗자루처럼 망가지고 우리의 눈빛도 낡은 오버의 단추처럼 손상된다. 그런 날들이 참으로 빠르게도 흘러가서 마침내 어는 날엔가는, 찬란하던 꿈의 본질도 물 빠진 치마를 입은 웨이트리스 같은, 그렇게 엉뚱한 모습으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의 꿈은 좀 역설적이다. 농담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속에 간절한 어떤 진심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농담이면서 진심이기도 한, 상처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꿈은 감방에 들어가 책만 읽는 것이라 한다. 그는 전에 시국사범으로 들어가 정말로 일 년 동안 책만 보고 갇혀 있었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비디오를 보는 게 아니라 책을 보겠다는 건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는 최근 들어 일 년에 세권도 책을 읽지 않으니까. 그 대신 비디오는 보기 시작하면 일 주일 내내 새벽 세시 네시가 되도록 두 편 세 편씩 겹쳐서 보며 새벽까지 비디오 축제를 벌인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는 아무것도 진지하게 할 수가 없어서 잠도 자지 않고 비디오를 보고 나는 잠을 잔다. 밤에도 자고 낮에도 빈집의 의자처럼 천으로 얼굴을 덮고 잠을 잔다. 우리의 진실은 무엇일까? 인생은 우리의 꿈을 두고 텔레비전 9시 뉴스와 서점 진열대를 덮는 월간지들과 거리를 방황하는 낯모를 패션들과 함께 다른 강물로 흘러간다. 거리 한구석에서 천천히 망가져가는 공중전화부스들과 건전지 빠진 장난감 같은 이웃집 여자들과 함께.......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진실은 강박관념과 같은 사소한 취미와 습관들뿐이다. 남편은 비디오를 보며 맹렬하게 발바닥을 비빈다. 커다란 파리처럼 두 개의 딱딱한 발바닥에서 비비 비비 마찰 소리가 난다. 나는 잠을 잔다. 시간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눈을 꽉 감는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우리는 꿈을 이루게 될까. 우린 그 꿈을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두려워하는 것일까.』                      -본문중에서-

  

그녀이름은 윤미소, 시골 국도변의 한적한 휴게소에서 스낵과 쿠키를 파는 웨이트리스가 되고 싶은 조그만 꿈과 한편으로는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남들이 다하는 결혼을 하고 평범하게 일상을 산다. 어느 날 정보신문에 과외를 한다는 광고를 내었는데 어떤 남자가 염소를 맡아 달라고 전화가 온다. 그 남자는 염소가 그 남자 새어머니의 영혼이라고 믿고 있다.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어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가야 하는데 염소를 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얼떨결에 염소를 맡게 된 여자, 도시에서 그것도 아파트에서 염소를 키우고 도시 거리를 염소를 몰고 활보하는 여자를 상상한다. 전혀 엉뚱하고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상황, 무기력한 삶에서 그녀는 염소를 통해 일탈을 꿈꾸는 것이다. 우산을 쓰고 비바람 몰아치는 아파트를 염소를 몰고 유유히 사라지는 여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우산을 썼다. 우산 속에 고여있던 물이 이미 젖어버린 머리카락 위에 흘러내렸다. 불 꺼진 아파트는 거대한 벽처럼 평면적으로 서 있었다. 집을 찾기는 쉬웠다. 거실에 불이 켜져 있어서 희미한 빛이 홈통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해변에 밀려 올라온 플라스틱 병처럼 머리카락에 빗물이 묻은 한 남자가 소파에 엎드려 자고 있는 집이었다. 슬픈 꿈이 넘쳐 어린 소녀의 잠든 눈가에 눈물이 배어 나오고 있을 집, 아침에 눈 뜨면 한 여자가 사라져버린 것을 조용히 알아채게 될, 이미 오래 전에 훼손된 집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그도 무언가를 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가두어놓기라도 한 듯 틀어박혀 책만 읽을 수도 있을 것이고, 자동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달려가 어딘가에 꽝 부딪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웃 사무실 여자와 미친 듯 살아볼 수도 있고, 혹은 훌쩍 떠나 버릴 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어쨌든 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

                                     - 본문마지막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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